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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 비판ㅡ공정하다는 착각

한국청년연대 2021. 3. 10. 18:00

‘1시간만 더 공부하면 마누라 얼굴이 바뀐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끔찍한 말이지만, 나의 학창시절 이 문구는 ‘급훈’과도 같았다. 노력해서 좋은 성적받고, 좋은 대학가서 성공하는 것. 당시에는 그 외에 다른 목표는 없었다. 그래서 나도 조금이나마 높은 성적을 받기 위해 발버둥 쳤고, 그 ‘수치화된 능력치’로 상위권 대학에 합격한 것을 자랑스러워 했다. 이렇게 노력하면 나는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능력이 많으면 대접 받아야지?’

전통사회는 세습을 통해 신분이 결정되었고, 개인 능력과 상관없이 사회적 계급이 결정되었다. 태생적이었던 것이다. 능력주의는 이 봉건적 질서에 맞서서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다, 나도 노력하면 올라설 수 있다는 가능성과 희망을 심어준다. 이는 신분사회 질서를 무너뜨릴 만큼 매우 강력한 이데올로기이며, 매력적인 담론이었다.

 

 

‘능력주의의 배신’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은 “능력주의란 평등을 받아들인 민주주의 사회에서 노골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불평등”이라며 ‘능력에 따른 불평등을 정당화한다’고 꼬집었다. 마이클 샌델 교수는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책을 통해 ‘능력대로 대접받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정의 내렸다. 왜 우리가 믿었던 능력주의라는 공정함이 이토록 큰 배신을 하였을까.

 

 

‘능력주의는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긴다’

능력주의는 오만하다. 승자들에게 자기 성공을 지나치게 과장하게 만든다. 따라서 그 성공을 뒷받침했던 우연적인 요소들(부모재산, 행운 등) 뿐만 아니라 그 성공을 위해 자행된 온갖 편법과 불법을 까먹게 한다. 반면 능력주의는 굴욕이기도 하다. 패자들에게 무한한 굴욕과 불만, 증오감을 심어준다. 이런 능력주의는 사회적인 연대의식을 상실케 하고,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불평등을 인정하고 용인하게 만드는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능력주의의 지향은 평등이 아니다.’

처음부터 능력주의는 더 많은 평등을 약속한 적이 없다. 더 많고, 더 공정한(?) 사회적 이동 가능성을 약속한다. 즉, 능력에 따라 새로운 불평등 구조를 재구축 할 뿐이다. 그래서 불평등을 해결하지 않고, 불평등을 합리화/정당화 한다.

‘아메리칸 드림은 없다’

한때 기회의 땅이었던 미국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적 계층이동은 급격히 줄어들고 있고, 능력주의는 이제 세습되기에 이르렀다. 부모의 재산이 세습되고, 학력이 세습되며, 기회를 독점한다. 그렇게 비대졸자와 노동계층을 정치담론에서 소외시키며 기술관료 중심으로 정치가 돌아가며, 또 다시 가진자들에게 유리한 법과 제도를 만든다. 트럼프의 당선, 영국의 브렉시트 등 기이한 포퓰리즘 정치현상은 바로 이 과정에 소외된 사람들의 축적된 분노에 대한 표출로 보는 것이 맞다.

‘능력주의를 깨부수려면’

마이클 샌델은 자기가 잘나서 잘된 것이 아니니 ‘겸손하라’고 타이른다. 자기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나가며 공동선을 고양해나가야 한다고 결론내렸다.

물론 인식의 전환은 필요하지만, 그것은 개개인의 노력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지금의 불평등 구조를 깨기위한 과감하고 도전적인 제도 도입과 거대한 사회적 항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재벌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 부동산 불로소득 등 모든 특혜들을 사회적 공론장에서 갑론을박 끝에 회수해낸다면. 그리고 그 막대한 자금이 청년과 민중들을 위해 재분배 된다면. 이를 타협없이 강행할 수 있는 진보정권과 그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민중들이 모든 반동을 이겨내고 실제로 실행해냈을 때, 인식의 전환/ 사회 대개혁이 실현되고, 불평등 문제가 해소될 수 있다. 이 정도는 해야 능력주의라는 괴물을 쓰러뜨릴 수 있지 않겠는가.

*본 글은 박태우 교육국장님이 기고해주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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