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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청년연대] 5.18 광주민중항쟁 39주년 기획교양글

한국청년연대 2019. 5. 17. 15:53

[한국청년연대] 5.18 광주민중항쟁 39주년 기획교양글

 

1. 독재에 맞선 국민들, 그리고 미국

- 1980년 광주, 신군부독재 물러가라!

197910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에서 술파티를 하던 도중 김재규의 저격으로 사망한 후, 한국사회는 억눌린 민주화의 열망이 봇물 터지듯 분출했다. 이른바 “80년 서울의 봄이 왔다.

그러나 19791212,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위시한 군부세력들은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도 없이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등을 체포하는 12.12군사반란을 일으켰다.

 

군부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은 이듬해인 1980517, 시국 수습을 명목으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으며, 일체의 정당 및 정치활동 금지, 국회 폐쇄를 비롯하여 영장 없이 정치인, 재야인사, 학생 2699명을 구금했다. 1980829, 전두환이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회에서 대통령이 될 때까지 신군부의 군정은 계속되었다.

 

19805.18 광주항쟁은 전두환 신군부의 5.17 비상계엄령 확대조치에 맞선 민주화투쟁이었다. 518일을 기해 전국의 대학은 일제히 휴교 조치되었지만 광주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교문에서 계엄군과 대치하였으며 300여명의 학생들은 가톨릭회관에서 “5.17 비상계엄령 확대를 규탄하는 집회를 가졌다.

 

학교정문에서 전경과 대치하고 있는 전남대학생들

비상계엄령으로 광주시내에 주둔한 군부는 대학생들의 집회를 가로막았고 이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였다. 518일 오후 4시부터는 공수부대가 집회에 참여한 대학생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 무자비하게 폭행, 살상하게 되자 광주시민들의 분노는 폭발하였다.

계엄군의 과도한 폭력에 분노한 광주의 시민들은 거리에 뛰쳐나왔고,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에 고등학생들까지 동참하기 시작했으며 520일에는 20만 명 이상이 집회에 함께 하였다.

 

급기야 계엄군은 521, 광주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자행하기에 이르렀고 분노한 시민들은 계엄군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전남 화순, 나주에서 경찰서와 파출소의 예비군 무기고를 열어 총을 들고 무장, 시민군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청년들은 총을 들고 무장을 하였으며 학생들은 방송을 하고 아주머니들은 주먹밥을 싸 날랐다. 521일부터 광주는 사실상 시민들의 자치상태로 전환되었지만 이 기간 광주시내의 범죄는 거의 보고되지 않았다.

 

독일 ‘슈피겔’지에 실린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든 아이 사진은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를 절묘하게 대비함으로써 광주의 아픔을 전 세계인에게 전해준 5·18의 상징적인 사진 중 하나이다.

결국 전두환 신군부는 527, 무려 25천명의 계엄군을 광주에 들이밀어 시민군을 진압하였다. 이들은 무려 1만여발의 탄환을 전남도청에 집중시켰으며 마지막까지 항거하던 시민군을 살상하였다.

 

국가에서 인정한 피해자(사망자와 행방불명자 포함)5060, 생존한 5.18피해자의 자살률은 10.4%, 5.18광주민중항쟁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행방불명자 대다수는 계엄군에 의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1988년 광주 청문회 당시 진압군 부대 지휘관들은 암매장이 없었다고 진술한 것과 다르게, 진압에 참가했던 공수부대원에 의해 2001년 당시 공수부대원이 비무장 민간인을 사살, 암매장했다는 양심선언이 발표됐다. 현재 광주 망월동 묘역에 당시 희생자들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항쟁기간 전남도청앞 광장은 사태의 추이를 알고자 하는 시민들로 가득 메워졌고, 항쟁지도부는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를 통해 사태의 본질을 알리는 한편 시국을 성토하였다.

1980525AFP 통신은 광주의 인상은 약탈과 방화와 난동이 아니다. 그들은 민주주의란 대의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라고 전 세계에 타전했다. 프랑스 언론사 르 몽드 지의 기자 필립 퐁스는 계엄군이 난입한 1980527일 아침의 광주는 죽음의 도시와 같았으며 그 때 당시 상황을 학살이라고 증언했다.

 

전두환(오른쪽)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1996년 8월 26일 나란히 법정에 섰다. 

전두환 신군부가 자행한 5.18 광주항쟁은 부메랑이 되어 날아왔다. 1988년 시작된 5.18 청문회로 인해 전두환은 대통령직에서 나오자마자 설악산 백담사로 쫓겨 들어가는 신세가 되었으며 정호용, 장세동을 비롯한 신군부 주요세력들은 구속되었다. 1996, 결국 신군부를 주도한 전두환, 노태우는 체포, 구속되었으며 12.12 군사쿠데타와 5.17 비상계엄확대 등의 죄명으로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226개월 형을 언도받았으며 각각 2205억원과 2628억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았다. 전두환, 노태우는 이후 항소심에서 무기징역, 17년형으로 감형되었다. 비록 1997, 김영삼 대통령이 이들을 사면하면서 이들에 대한 사법처리가 집행되지는 못했지만, 역사는 영원히 이들 두 쿠데타 주동자들을 전직대통령이기 이전에 군부쿠데타 주동세력으로, 시민학살자로 기록하고 있다.

 

- 1980, 신군부의 뒤에는 미국이 있었다

5.18광주민중항쟁이 주목되는 것 중 하나가 미국의 역할이다.

 

미국은 민주화 투쟁을 진압하기 위한 전두환 신군부의 1980517일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사전에 승인했다. 글라이스틴 미국 대사는 계엄령이 선포되기 전인 58, 한국 내 정세를 논하기 위해 전두환과 최규하를 만나기 직전에 워싱턴으로 다음과 같은 외교 전문을 보냈다.

한국 정부가 군대를 투입하는 것에 대해 미국 정부가 반대한다는 암시를 주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한 워싱턴의 답장 또한 충격적이다.

미국 정부는 법과 질서유지를 위한 한국 정부의 비상계획에 반대해서는 안 된다는 데 동의한다.”

주한 미군사령부는 포항의 해병 1사단이 대전과 부산지역으로 이동할 가능성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 있으며 해병 1사단은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 아래 있으므로 병력이동에는 미국 당국의 승인이 필요하다. 아직 한국 군부로부터 병력 이동에 대한 아무런 요청이 없지만 만일 요청이 오면 미군사령부는 동의할 것이다.”

 

1989년 광주특위에 보낸 미국 답변서 내용을 보도한 한겨레 신문 기사

광주 항쟁이 521일을 기점으로 무장항쟁의 단계로 들어서자 미국은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522일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소집하여, 미 국무장관 머스키, 국방장관 브라운, 안보담당보좌관 브레진스키, 중앙정보부 국장 등이 참가한 가운데 광주 진압작전을 의결하였다고 한다. 미국은 이 계획에 따라 오키나와 미공군기지에 있는 E-3A 공중경보 통제기 2, 일본 요코스카와 필리핀에 각각 정박되어 있던 항공모함 미드웨이호와 코럴시호를 한국으로 급파하였다.

 

광주 진압 작전에 동원된 공수부대의 이동을 승인해준 결정적 인물은 주한미군 사령관 존 위컴이다. 아래는 존 위컴의 조치에 대한 1980522일자 동아일보 보도내용이다.

존 위컴 주한유엔군 및 한미연합군 사령관은 그의 작전지휘권 아래에 있는 일부 한국군을 군중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한국 정부의 요청을 받고 이에 동의했다.”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이었던 위컴은 베트남전 참전을 계기로 전두환과 가까운 사이였다. 1980, 주한 미8군 사령관이었던 위컴은 한국인은 들쥐와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든 그를 따른다는 망언을 남겼다.

 

5.18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한국사회에서는 미국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5.18광주민중항쟁 이후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등을 비롯하여 미국에 5.18광주학살의 책임을 묻는 행동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2. 청산되지 않은 역사는 되풀이된다

-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5.18의 진실

5.18 당시 전두환의 행보에 대한 새로운 증언이 나오고 있다. 미육군 방첩부대 501정보여단의 광주파견대 군사정보관이었던 김용장씨와 전 505보안대 요원인 허장환씨는 기자회견을 통해 5.18당시 전두환의 행보를 폭로했다.

 

5.18 당시 허장환 전 보안사 특명부장(왼쪽)이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특별기자회견에 참석해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내용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521일 점심 12시 전후로 헬기를 타고 K57(군 비행장)에 왔고 오자마자 비행단장실에서 회의를 열었다는 것, 회의 참석자는 정호용 특전사령관, 이재우 505보안부대장 등 4명이었다는 것과 전두환은 발포명령이 아닌 사살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또한 ‘5.18 당시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몰아가기 위해 사복군인 공작조를 군수송기로 실어날랐다는 증언을 비롯하여 간첩침투를 색출하기 위해 가매장한 시신을 재발굴해서 지문을 채취하고 일부는 광주통합병원에서 소각했다는 충격적 사실이었다.

5.18광주민중항쟁이 발발한지 39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우리는 5.18의 진실에 다가가지 못했다.

 

올해 311, 전두환은 5.18당시 헬기사격 목격을 증언했던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광주법원을 찾았다. 광주에 도착한 전두환에게 기자들이 질문이 쏟아지자 그가 뱉은 말은 이거 왜 이래였다. 무고한 광주 시민들을 빨갱이로 매도하고 사살하라 명령을 내렸던 그는 고인들과 유가족들에 대한 사죄를 해도 모자랄판에 우리가 봤던 그가 했던 말은 저 5글자 뿐이었다.

오죽하면 초등학교 아이들까지 광주법원으로 들어가는 전두환의 차량을 향해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외쳤겠는가.

 

- 5.18광주민중항쟁을 왜곡하고 폄훼하는 자들

올해 28‘5.18진상규명 대국민공청회에서 자유한국당의 이종명 의원은 논리적으로 5.18은 북한군이 개입한 폭동이었다는 것을 밝혀내야 한다라고 했고, 김순례 의원은 종북좌파들이 5.18유공자라는 이상한 괴물집단을 만들어내 세금을 축내고 있다라 했으며, 김진태 의원은 “5.18문제만큼은 우파가 결코 물러서면 안된다는 망언을 하여 518유가족들을 비롯한 국민들을 분노케하였다.

이들은 극우논객인 지만원을 존경한다며, 이런 발언들을 했다.

지만원은 광주는 빨갱이들의 성지라며 518이 북한군이 개입된 사건이라고 떠들어댄 자다.

지만원은 이로 인해 현재 518관련단체들의 고소고발로 재판을 받고 있다.

 

유네스코에서는 5.18광주민중항쟁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하였다. 5.18광주민중항쟁은 전세계가 인정하는 역사적인 민주화운동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를 폄훼왜곡하는 행위를 멈추지 않고 있다.

 

옛전남도청에서 열린 518망언을 규탄하는 기자회견

5.18망언의원을 제명하고 처벌하라는 국민들의 요구가 거세지자, 자유한국당은 이들에 대한 징계를 발표했다. 하지만 자유한국당의 처벌은 당원권 3개월 정지, 경고로 솜방망이 처벌에 불과했다.

 

5.18유가족들과 단체들은 자유한국당에 5.18망언의원 제명, 5.18진상규명, 5.18역사왜곡특별법 제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러한 요구에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있는 자유한국당은 5.18에 맞춰 황교안 대표가 광주를 방문한다고 한다.

연일 광주를 비롯하여 서울 등 각계에서는 위의 요구사항을 동의하지 않으면 황교안 대표의 광주방문을 용납할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518학살자인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세력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했기에 그 후예인 자유한국당과 적폐세력들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518을 폄훼하고 있다.

또한 미국은 전두환의 반란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묵인하고 오히려 전두환을 보호하기 위해 항공모함을 파견하였다.

 

청산되지 않은 역사는 반복된다. 죄를 저지른 자들을 처벌해야 다시는 이러한 학살비극이 발생하지 않는다.

 

3. 오월에서 통일로!

- 빨갱이와 종북, 분단이라는 괴물

80년 광주의 시민들은 북한의 지령을 받은 빨갱이, 폭도로 매도되었다.

신군부독재 하에 있던 언론들도 하나같이 1980년 광주에서 빨갱이들이 폭도를 일으켰다고 보도하였다.

일제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나라가 분단된 후, 집권세력들의 논리는 한결같았다.

제주 4.3항쟁을 벌였던 제주도민들은 빨갱이, 폭도로 매도되어 학살되었고, 진보당 조봉암 당수는 간첩죄의 누명을 뒤집어쓰고 사형을 당했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도 5.18광주민중항쟁 이후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통합진보당이 내란음모 조작사건으로 종북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되어 원내합법정당이 해산되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도 종북단체 활동을 하고 있다고 매도하며 압수수색과 연행, 체포를 하기도 한다.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집회를 열고 세월호 유가족이 요구하는 기소권과 수사권이 보장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청소년들

그리고 여전히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수구세력들은 진보와 민주주의, 평화와 통일을 주장하는 세력들을 종북으로 매도하고 있으며, 주말마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고 있다.

 

한반도의 근본문제인 분단체제를 극복하지 않고서 이 땅의 민주주의와 민생은 없다.

 

- 5.18정신계승으로 한반도 평화와 번영, 통일을 실현하자!

지난해 우리는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에 평화와 번영, 통일의 봄이 오고 있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완전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실현하기까지는 난관과 어려움도 존재한다. 올해초 많은 기대를 모았던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에서는 미국의 강도적 태도로 합의문 채택이 불발되었으며, 현재 남북관계도 정체되어 있는 상황이다.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수구세력들은 반북발언을 일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은 이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다.

5.18학살주범인 전두환, 노태우를 기어이 감옥으로 보낸 우리 국민들이다.

또한 촛불의 힘으로 한국사회를 비정상으로 만들고, 국민들의 삶을 파탄낸 이명박근혜 독재를 단죄하였다.

독재에 맞서 싸우고 독재를 심판해온 우리 국민들이다.

여기에 북이 가지고 있는 군사적 힘까지 더해지며 한반도가 전세계의 중심이 되고 있다.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친다면, 더 이상 미국에게 끌려다닐 일은 없다.

 

세월호 참사 5주기 기억문화제에서 참석자들이 촛불과 스마트폰 불빛을 밝히고 있다. 

5.18신군부의 뒤에 숨어 있었던 미국과 미국의 비호를 받으며 지금까지 살아온 군부독재의 후예인 자유한국당.

그들은 여전히 광주학살의 책임에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으며, 지금도 이 땅에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다.

분단이라는 기형적인 한국사회의 현실이 빚은 광주학살의 비극, 이제 그 책임자들에게 사죄를 받고 그들을 처벌해야 한다.

그리고 비정상적인 한국사회, 한반도의 현실을 정상화시키고, 이 땅의 평화와 번영, 통일의 길로 나가야될 때다. 오월에서 통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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